FC 바르셀로나는 1899년에 창단
<로스 데포르테스(Los Deportes)> 신문에 난 조그만 축구팀 창단 광고였다.
스위스 출신인 한스 감페르(조안 감페르)가 신문에 축구팀 창단 광고를 냈고, 11월 29일 힘나시오 솔레에서 창단 모임을 열었다. 당시에는 프리메라리가 구성되지 않았기에 카탈루냐 챔피언십과 코파 델 레이(국왕컵)에 참가.
창단을 주도한 감페르는 1908년 클럽의 회장이 됐고, FC 바르셀로나는 처음으로 홈 경기장을 얻었다. 첫 경기장은 캄 데 라 인두스트리아(Camp de la Indústria)로 8천 석 규모였다.
감페르는 1925년까지 5차례에 걸쳐 회장을 역임하면서 FC 바르셀로나의 초석을 다졌는데, 1930년에 금전 문제 등 여러 가지로 실의에 빠져 자살했다.
1928년 프리메라리가가 출범하면서 FC 바르셀로나도 참가했다. 그리고 바로 초대 챔피언에도 올랐다. 1928/29시즌을 제패한 FC 바르셀로나는 출발이 좋았지만, 가속도가 좀처럼 붙지 않았다. 1936년 스페인 내전이 발발해 1939년에 마드리드 출신의 독재자 프란시스코 프랑코가 스페인을 철권통치하면서 FC 바르셀로나는 곧바로 늪에 빠졌다. 카탈루냐어와 카탈루냐 국기 사용이 금지됐고, FC 바르셀로나는 CF 바르셀로나(Club de Fútbol Barcelona)로 이름까지 바꿔야 했다. 하지만 FC 바르셀로나는 쓰러지지 않았다. 1944/45, 1947/48, 1948/49시즌에 우승을 차지하면서 1940년대를 평정했다.
진정한 암흑기는 1960년부터 1970년대 초까지였다. 홈구장인 캄 노우를 지으면서 재정이 바닥나 좋은 선수를 영입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13년 동안 거둔 성적 중 준우승이 가장 좋은 성과일 정도였다.
그런데 이 암흑기는 한 사내의 등장으로 끝났다. 1973년, 축구 천재 요한 크루이프가 입단한 것이다. 크루이프는 “프랑코 정권의 지원을 받는 클럽에서 뛰고 싶지 않았다”라는 입단 소감을 밝힌 후 팀을 바로 우승으로 이끌었다. 크루이프는 그해 발롱도르를 수상하기도 했다.
선수로서 요한 크루이프가 현 FC 바르셀로나의 초석을 다졌다면, 회장으로서는 단연 주제프 유이스 누녜스가 돋보인다. 누녜스는 1978년 FC 바르셀로나의 수장에 올랐고, 팀을 한 단계 위로 올려놨다. 그는 팀의 재정을 탄탄하게 만들었고 세계적인 선수들을 불러들였다. 1982년 디에고 마라도나를 역대 최고 이적료에 영입한 일은 그가 팀에 남긴 여러 성과 중 하나의 상장으로 남았다. 누녜스는 이후 베른트 슈스터, 게리 리네커, 안도니 수비사레타 등을 차례로 영입했다.
창단 모토는 클럽 그 이상(Més que un club).
또다른 이 클럽의 특이사항으로는 세계 최초로 협동조합 형태로 운영되는 축구 클럽이라는 것. 일종의 시민구단이라고 보면 된다. 박물관 2층 입구에도 '바르사의 주인은 조합원'이라고 새겨놓았을 정도다.
그래서, FC 바르셀로나는 구단주가 구단을 창설하면 그에 맞춰서 팬들이 생겨나는 방식이 아니라, 축구팬들이 자발적으로 자본을 출자하여 구단을 만들어서 운영하는 방식으로 운영되고 있으며 구단의 회장까지도 6년마다 한 번씩 팬들의 투표를 통해서 선출한다.
투표권이 주어지는 자격은 가입 경력 1년 이상, 18세 이상이라면 누구나 6년마다 한 번씩 치러지는 클럽 회장 선거에서 투표를 행사하면서 회장을 선출할 권리를 가질 수 있다. 단, 회장 출마는 카탈루냐인만 가능한데, 2019년 1월 기준으로 현재 회장은 조세프 마리아 바르토메우이다. 전임 회장인 산드로 로셀이 61.35%의 역대 최다 득표율로 회장에 선출되면서, 바르토메우는 구단 협상 담당 및, 부회장으로 임명되었다. 이후에 산드로 로셀이 구단 내부에 문제를 일으키면서 사임하자 부회장인 바르토메우가 회장직을 이어받았다. 2015년 신임 회장 투표에 출마해서, 이전 바르셀로나 회장이었던 호안 라포르타를 누르고 정식 회장에 당선되면서 현재 구단을 운영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