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아솔 이종격투기선수
출생 1986년 8월 22일
소속사 로드FC
신체 177cm, 80kg
리츠메이칸 아시아태평양대학교 경영학
로드 FC 라이트급 챔피언
일본에서 유학 생활 중 텔레비전을 통해 격투기를 알게 되었고, 2003년 격투기계에 정식 입문, 빠른 성장세를 보이며 2년 만에 프로 데뷔전을 가졌다. 프로 데뷔전은 네오 파이트 6회 대회 메인카드 라이트급 매치에서 최승필과 가졌고 파운딩에 의한 TKO승을 거뒀다.
권아솔의 별명은 ‘트래쉬 토커’다. 어느 순간부터 그랬다. 대회를 앞두고, 그의 공격적인 발언을 듣지 않으면 소금 빠진 국물처럼 싱겁고, 맹맹한 분위기가 연출됐다. 하지만, 이젠 권아솔을 빼놓고 로드 FC를 논할 수 없게 된 것도 사실이다.
권아솔, 진정한 격투가, 그와의 인터뷰
“제 삶은 늘 외로웠습니다. 그래선지 케이지에 오르면 오히려 마음이 편했어요. 제게 격투기는 ‘안정제’와 같았습니다. 지금도 그렇고요.” 권아솔의 말이다.
“격투계에 뛰어든 건, 불우한 어린 시절에 대한 반항 때문이었습니다.”
스무 살에 정식 파이터로 데뷔, 대학교 입학을 두고 내린 결정이었다. 오랜 시간 고민하고, 망설였다. 그러나 어린 시절 자신을 키워준 할머니 때문이라고 합니다.
“사실 시장 분위기는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예요. 여전히 국내 격투기 앞엔 '비인기 종목'이란 꼬리표가 붙습니다. 전 그나마 나은 편이었어요. 다른 선수들에 비해 관심을 빨리 받았으니까요. 하지만, 늘 배고픔과 목마름은 피할 수 없었습니다.”
“말이 국외 진출이지 사실상 ‘맷값’ 벌로 다닌 거였어요(웃음). 아무래도 일본이나 중국 단체 쪽은 자국 선수들이 이기길 바랍니다. 그래야 흥행이 되니까요. 한국 선수들은 주로 돈 받고, 패하는 역할을 맡았어요. 돈 벌기 위해 싸우는 '검투사'라고 해야 할까. 사실 그렇게라도 싸우고 싶었습니다. 한국 파이터들의 비애였죠.”
“‘사명감’이라고 해야 할까요. 제겐 '십자가'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격투기는 프로야구나 프로축구처럼 대기업 스폰서으로부터 지원받는 환경이 아니에요. 많은 파이터가 풍족하게 살 수 없습니다. 안타까운 마음에 후배들을 위해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고민하다 '이 판을 키워보자'고 다짐했어요. 격투기의 가치가 올라가길 바라는 마음에서 시작하게 됐습니다.” 권아솔의 진심이다.
"지금은 서울에 살지만, 처음엔 목포가 제 연고지였어요. 파이터들을 딱히 만날 일이 없었죠(웃음). 시간이 흐르면서 팬들이 조금씩 절 이해하시는 것 같았고. 물론 사석에서 선·후배들을 만나면 눈치가 보이곤 했습니다. 그럴 때일수록 선배들에겐 더 예의 바르고, 후배들을 배려하려고 노력했어요. 조금 심했다 싶은 날엔 제가 먼저 찾아가 ‘선배님, 이해 부탁드립니다’라고 정중히 사과드렸어요. 요즘엔 ‘트래쉬 토커해도 되냐’고 묻는 후배들도 있습니다(웃음).”
23일 권아솔은 SNS에 'ROAD FC 제주도 대회'의 기사를 발췌, 월드챔피언급 선수들을 도발하는 게시물을 올렸습니다.
이엔 그가 "너희는 아시아 먹으려면 나밖에 없다"라며 넘치는 승부욕과 도발성 멘트가 담겨있었다.
또한 같은 날 열린 '로드 FC 052' 결승전서도 그는 승리한 만수르에게 꽃다발을 건네려다 일부러 떨어트리는 모습도 보였다.
이에 그의 SNS에는 "조금만 겸손했으면...아무리 그래도 꽃다발 주는 모습은 아니다"라는 일각의 비난이 쏟아지기도 했습니다.